“그후 암피폴리와 아폴로니아를 경유하며 데살로니가에 오니, 거기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은 습관대로 그들에게 가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변론하더라.”(행전 17:1,2) 이런 구절들을 가지고 안식교인들은 우리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회당”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과도기에(B.C. 400-A.D.90) 유대인들이 임시방편으로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집회 장소는 성전이었고, 그전에는 “장막”이나 “성막”이 그 역할을 감당했었다(삼하 7:6, 출 39:40, 대상 9:19, 사 16:5, 행 15:16). 구약의 유대인 중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회당에 모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예배를 위해 회당에 모이지 않았다. 교회 건물은 회당이 아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안식교인들은 바울이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회당으로 들어간 사실을 가지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지켰다고 스스로 속인다.
안식교인들이 그 근거로 인용하는 구절들은 사도행전 13:42와 16:13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13:42의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사도행전 16:13의 이방인 여인들은 안식일 날 회당에 모여 기도하는 유대교의 관습을 따르던 여인들이었다. 모든 유대교 개종자들은(행 9장의 아나니아, 10장의 코넬료, 8장의 에디오피아 내시, 눅 7:5의 백부장, 행 2:10의 수많은 사람들) 신약의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 구약식으로 구원받은 사람이거나, 구원받지 못한 채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던 내시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코넬료(행 11:14을 볼 것)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루디아나 빌립보 간수도 바울이 에베소서 2:1-6이나 고린도전서 15:1-6, 혹은 요한복음 3:16을 전해 주기 전까지는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안식교인들은 이들이 “안식일을 지키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에베소에 있던 아폴로의 제자들(행 19:1-4)을 회당에 모여서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의 한 예로 제시한다. 그러나 아폴로의 개종자들은 바울을 만나기 전에는 신약의 복음을 몰랐고 구원을 받지도 못한 상태였다(행 19:4).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이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유대교 개종자들에게 갔던 것이다(행 18:1,4이나 17:1-3도 같은 경우이다). 안식교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한 유대인(바울)이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서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장면을 두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특정한 날에 어떤 특정한 교회로 가야 하는지를 규명해 준 구절이라고 믿어버리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배드리기 위해” 유대인의 회당으로 모이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을 검토해 보자. 안식교 :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셨다.”(눅 4:16-마 4:23 사이에서 발견되는 모습임) 물론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 계셨으며, 정통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지키셔야 했다. 그러나 3년 반 동안 안식일이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고정적으로“ 겹쳤던 경우는 없었다. 안식교 :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안식일이 존재한다.”(눅 23:56) 물론 정통 유대인에게는 그렇다. 누가복음 23:24장의 모든 여인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율법 아래 있는 정통 유대인이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아직 율법 아래 있는 줄로 여기고 있었다. 안식교: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안식일은 남아 있다.”(마 24:30) 마태복음 24:10-12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신약의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다. 안식교: “안식일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존재한다.”(행 16:13). 바울이 왜 “자기 처소”(출 16:29)에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할 안식일에 강가를 어슬렁거리고 있었겠는가? 강가에 있던 사람들 중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없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마음이 주께로 열려진” 이방 여인들과 이교도들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