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한국 교계에는 6,70년대의 부흥회, 선교 단체의 전도운동, 80년대의 제자화 운동, 90년대의 경배와 찬양, 빈야드 운동에 이어 또 하나의 “영적 운동”으로 소위 “열린 예배”(Seeker Service, 또는 구도자 예배)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 열린 예배를 통해 이미 급격한 “교회 성장”을 체험한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와 새들백 교회의 사역이 소개되면서 한국 교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이 “열린 예배”는 기독교 문화에 낯선 불신자들을 교회 안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세상 문화를 예배의 도구로 접목시킨 것이다. 예를 들면 랩을 가미한 가스펠 송, 재즈 찬양, 드라마, 연극, 무용, 영상, 토크쇼 등이 그것이며, 이 외에도 문화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한계는 끝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잃어버린 영혼에게 부드럽게 다가서자”는 열린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을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문화”는 교회사(이교도-복음전파-성경교육-문화-배교)에서 늘 배교로 나아가는 변질이 진행되는 첫걸음이었다. 이 단계에서 세상을 향한 문이 열려지게 되는 것을 그들은 인지하지 못한다. 또한 이들은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요 4:24)는 것은 물론이요, 누가 예배드릴 자격이 있는지(거듭난 그리스도인) 전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현란한 몸짓과 손동작”이나 인간의 감정이나 건드리는 노래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념하지 않는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롬 12:2). 이 열린 예배는 그것에 대한 성격 규정에 있어 두 부류로 나뉜다. 한 부류는 이 예배를 “전도 집회”로 규정하는데, 이들은 교회를 “밥”으로, 기도원을 “약”으로 비유하듯이, 이 전도 집회 또한 “약”으로 비유하여 한국 교회 성장에 약효가 있을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아예 일요일 예배 자체를 “열린 예배”로 마련하기도 하고(“신자들”의 예배는 평일에 드린다), 교회의 전반적인 모습이나 분위기까지 카페나 가정집으로 만드는 배려까지 하며, 심지어 설교하는 목사까지도 캐주얼 차림을 하고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예배에서 기본적이고도 쉽게, 가볍고 부드럽게 불신자들의 마음을 건드리거나 상하지 않도록 전해지는 말로 과연 죄인들이 찔림을 받겠는가? 하나님의 양날 선 칼로 영과 혼 그리고 관절과 골수를 찔러 가르고 마음의 생각과 의도들을 판별하는(히 4:12) 강력한 설교가 아니고서야 문화에 이끌려온 불신자들이 자신들이 죄인인 것과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 구주가 필요함을 인정하고 그들의 의지의 선택으로 하나님께로 나아오겠는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감정적인 것들로 하나님의 사역을 흉내 내는 것은 모조품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한국 교회의 최대 관심 분야는 교회성장이다.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고, 새로운 부흥을 위하여” 등의 거창한 이유들을 내세우고 있음에도, 그들의 가장 관심 있는 분야는 복음도 예수 그리스도도 아닌, 바로 “교회 성장”인 것이다. 아무리 복음의 의미가 희석되고 성경적 기준에서 벗어나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분명히 “교회성장”이라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과제가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거듭났든지 거듭나지 않았든지 일단 교회에 오면 출석 교인으로 올려서 숫자를 자랑하다가, 이제 그 숫자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자 그 문을 더욱 활짝 열어서 세상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도, 복음에도 관심이 없는 자들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아무리 “효과적인 방법”이나 “유용한 방법”을 들먹이며 나올지라도 결코 그들에게 우롱당하지 않으신다. 참으로 잃어버린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구도자를 위한 집회니, 열린 예배니 하며 세상과 비슷해져 보려는 노력은 그만두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 "아끼지 말고 크게 외치며,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이라. 그들의 허물을 내 백성에게, 그들의 죄를 야곱의 집에 보이라"(사 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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