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성령의 은사들 (2) -Contin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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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3 6월 2009 12:12 |
사람들이 성경을 거부하게 될 때 (현대의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의 현대주의운동에 맞추기 위해 누가복음 2:33을 뜯어고친 것이나 가장 큰 신학대학들에서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이 교회협의회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디모데전서 3:16을 고친 것처럼) 성령의 열매는 위조될 수 없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이상한 기독교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위조품은 미국의 가장 큰 신학교에서 만들어졌다. 이들을 만났을 때 제일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이 가장하는 경건이다. 이것은 소위 “억지로 하는 경건”이다. 겉으로는 “번쩍번쩍 하고” 빛나지만 한 번만 걷어차면 그 위선은 마루바닥에 산산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성령의 열매를 모방하는 자들은 가장 권위가 있다고 하는 각종 신학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여러분은 은사주의 단체들이 성령의 은사들을 모방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한 번만 걷어차면 모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린 사람이라면 그렇게 쉽게 화를 내지는 않는다. 위선자가 성령의 열매를 흉내내고자 할 때 (성령의 열매가 없을 때) 또 성령의 은사들을 흉내내고자 할 때(성령의 은사들이 없을 때) 한 번만 걷어차면 그 위선자의 육신적인 본성은 다 드러나고 만다. 우리는 지금 성령의 은사들을 살펴보고 있다. 현대의 배교한 근본주의자는 이 부분에 관심이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이 권위에 앉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사도적 권위가 있음을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권위를 얻기 위해 사도들이 활동하던 사도행전으로 항상 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사도의 표적들을 자신이 소유했음을 입증하려 애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2장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해당되었던 사도의 표적들이 오늘날까지도 분명히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표적들을 모방하게 되고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게 되며 자신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차지하고 만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써먹는 수법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수백만 달러씩 들여 전개하는 전국적인 규모의 운동(성령운동, 회개운동, 통일운동, 개혁운동, 등)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뒤집어 엎기 위해 고안한 위장전술일 뿐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들의 종류를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8-10에서 나타나는 은사들은 지혜, 지식, 믿음, 병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을 분별함, 방언들, 방언들을 통역하는 은사이다. 여기에서 “방언들”은 하나님께서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주셨던 가장 작은 은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은사들에만 열중하고 성령의 열매는 무시하였다. 주님께서는 이 은사들을 그들에게 주셨고, 그들에게 은사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신 은사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은 방언이었다. 방언은 항상 은사들을 열거하는 데 있어서 마지막에 나온다.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중요성에 있어서도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로 고린도전서 12:28에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 기록되는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첫째는 사도요...” 다음 순서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참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라면 방언을 가지고 속이는 자들보다 더 영적으로 깨어 있고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 셋째 다음에는 가장 작은 은사들의 순서가 따른다. “그 다음은 능력 행함이요...”(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한다. 만일 보는 것으로 행하고 있다면 계속 사다리 밑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며,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여러 가지 방언들이라.” 방언은 맨 밑에 위치하는 은사였다. 즉 그리스도인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작은 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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