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성경에서 “친절”이나 “온유”라는 말은 인사하거나 누군가를 우러러보는 것과는 전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필요할 때 이 속성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어떻게 친절하게 대하셨는지 보라. 그리고 니코데모를 얼마나 거칠게 다루셨는가 보라.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얼마나 친절하게 대하셨는지 알았는가? 또 카야파를 얼마나 거칠게 다루셨는지 알고 있는가?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던 여인을 어떻게 친절하게 대하셨는지 알고 있는가? 그리고 같이 식사하던 집주인을 어떻게 거칠게 대하셨는지 알고 있는가? 성령의 열매 중 여섯 번째는 선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열매로 인해 선한 일들로 넘친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일에 유념하며 진력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딛 3:8). 구원받기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 중 일곱 번째는 믿음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 “보는 것”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을 나타내고 또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의 삶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롬 1:17).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믿는 자들 안에서 믿음을 주시고(롬 10:17)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믿음의 분량을 주신다(롬 12:3). 현대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주장하는 스와거트(Swaggart), 캪(Kapp), 쿨만(Kuchlman), 로버츠(Roberts), 고어먼(Goreman), 코프랜드(Copeland)와 같은 사람들은 이 믿음과는 관련이 없다. 그들의 “믿음”은 자기 최면에 의해 나온 자기 암시일 뿐이다. 이는 심리 현상으로서 자신들을 드높이기 위해 성공을 위한 신념을 갖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을 뿐이다. 성공하기 위한 믿음을 원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 중 여덟 번째는 온유이다. 이는 기질이 온순함을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하셨다. 우리들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 디모데후서 2:25에서 다시 유념할 것은 이 온유한 것, 혹은 기질이 온순한 것은 항상 온순한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성전으로 들어가 탁자를 걷어차고 돈을 바닥에 뿌리고 사람을 채찍으로 때렸던 분은 “친절하고 온유하고 온순한” 예수님이셨다.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을 불못에 던져 버리겠다(마 25장)고 말씀하신 분은 “온유하신 주 예수님”이시다. “기질이 온순한 것”은 단순히 온순함을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의로운 분노는 옳은 것이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냉정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성령의 열매 중 아홉 번째는 절제이다. 이는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마시는 데 있어서, 먹는 데 있어서, 옷입는 데 있어서, 취미와 패션에 있어서 절제해야 한다. 이 성령의 아홉 부분은 모두 갈라디아서 5장에 언급된 불결한 육신의 일들과는 대조적이다. 죽음이 전제되지 않고는 열매는 있을 수 없다. 믿는 자가 죽기까지는 믿는 자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는 있을 수 없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거두는 것은 단지 육신의 일들 뿐이다. 그러므로 열매는 믿는 자의 삶 안에서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힌 증거이다. 그래서 믿는 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힌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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