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들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내적 치유”는 그 본질상 철저하게 비성경적이며 그 기법은 샤머니즘에 기초한 심리학이다. 많은 목사들이 내적 치유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부정적 영향을 주는 과거의 특정 사건을 구상화(머릿속에 무언가를 생생하게 그리는 샤머니즘 기법)하게 만들고 그 사건을 자기가 원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새로이 머릿속에 구상화하도록 교인들에게 가르친다.
과거의 사건은 물론 우리의 현재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 사람의 전체 역사”가 “마음과 정신 밑에 깔려있는 원망”을 포함하여 연구되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도 아니며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결코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그 사건에 반응하는가. 이며, 이는 맨 처음에 반응했던 대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구원받고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할 때 교정된다. 따라서 과거의 정신 충격을 머릿속에서 재현하려는 시도는 유익보다 더 많은 해를 준다. 모든 과거 경험을 들추어내는 것은 끝없이 계속되는 쓸데없는 짓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과거에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과거에 매여 있지 않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시다. 그 생명은 “내적 치유”나 어떤 비성경적인 치료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시는 날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 날 이래로 성령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생명 속에서 역사하시면서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키신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현재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을 누리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비결은 바로 지금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의 많은 거짓 교사들은 우리가 지닌 원망을 포함하여 우리가 범한 죄들은 우리가 십자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일일이 기억되고 회개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을 일일이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며 거짓된 기억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도는 다르지만 절망, 염려, 나쁜 습관, 후회, 죄의식, 원망, 질투, 불안감, 공포, 정욕 등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회에서 가장 크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애정과 시간을 가지고 있고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상담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담은 어디까지나 성경에 근거해야 하며 비성경적이고 때로 마귀적인 심리학적 이론들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점성술 같은 것은 추호도 믿지 않으면서 그 논리 및 해석상 그와 똑같이 오류로 점철된 “정신 치료법”에는 수 년 동안 자신을 내맡기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내적 치유는 “문제 해결”을 위해 암시력(power of suggestion)을 이용하는 기독교 화된 정신 분석이며, 그들이 다루는 “문제”조차 없던 것을 만들어 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여러 형태의 “정신 요법”도 마찬가지다. 내적 치유가 실행되기 시작한 교회에서 교인들은 실제로 그들이 인식조차 못했던 깊이 묻힌 상처와 원망에 좌지우지되고 있다고 믿기 시작한 후에 오히려 더 침울하게 되었다는 고백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되는 기억의 치유 과정 사실은 그들을 혼란 시키는 거짓 기억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거짓 목사들이 주장하는 말보다는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인들도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위대한 사도라고 해서 그의 말한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그 말들이 그런가 하여 매일 성경을 상고”했다(행 17:11). 우리는 각자 어떤 사람의 해석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성경 자체에 근거해서 우리가 믿는 것과 우리가 그것을 믿는 이유에 대한 확고한 확신에 이르러야 한다. 그럴 때만이 기독교 속에 만연한 마귀의 미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전 세계 50만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읽은 <기독교 속의 미혹>(데이브 헌트 저)에서 발췌)